AI로 설계하는 민주주의의 미래: 볼링 그린의 시민 참여 실험 분석

AI로 설계하는 민주주의의 미래: 켄터키주 볼링 그린의 실험

2025년 켄터키주의 중소도시 볼링 그린(Bowling Green)은 미국에서 가장 야심찬 AI 기반 시민 참여 프로젝트 중 하나를 마무리했습니다. 이 도시는 75,000명의 주민들과 함께, 인공지능을 활용한 온라인 여론 수렴 플랫폼을 통해 도시의 미래 청사진을 공동 설계하려는 실험에 나섰습니다. 이 실험은 단순한 기술적 시도를 넘어, 미래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할 수 있을지를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사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왜 AI를 활용한 민주주의인가?

현대 사회에서 시민의견 수렴은 날로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전통적인 타운홀 미팅은 참석률이 낮고, 설문조사 역시 표본의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빠르게 성장하고 다문화화되는 도시에서는 다양한 배경의 시민 목소리를 포착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에 따라 일부 도시들과 연구기관은 ‘민주주의 기술’(Civic Tech) 도입을 시도해왔고, 그 중 인공지능(AI)은 여론을 분석하고 의견을 집계하는 데 있어 핵심 기술로 떠올랐습니다.

볼링 그린에서 선택한 플랫폼은 Pol.is라는 오픈소스 설문 플랫폼입니다. 이는 머신러닝을 활용해 수천 명의 의견을 정리하고, 사람들이 어떤 주제에서 의견이 일치하고 충돌하는지를 시각화해 보여주는 도구입니다. 이 플랫폼은 대만 정부와 유럽 여러 도시에서도 성공적으로 활용된 사례가 있으며, 실시간 의견수렴이 가능하다는 장점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볼링 그린의 25년 미래 계획: 시민이 직접 만든다

2023년에 취임한 지역 행정 책임자 더그 고먼(Doug Gorman)은 도시의 빠른 성장세(2050년까지 인구 두 배 예상)에 비해 도시 개발 비전이 부족하다는 문제를 인지했습니다. 이에 고먼은 Pol.is 전문가인 지역 컨설턴트 샘 포드(Sam Ford)와 함께 8개 분야(경제, 인력개발, 주택, 공공보건, 삶의 질, 관광, 지역 스토리텔링, 인프라)에 걸친 자원자 그룹을 결성했습니다.

2025년 2월, 1개월 간 운영된 이 설문 실험에는 전체 인구의 약 10%인 7,890명이 참여했고, 그 중 약 2,000명은 자신의 의견을 직접 제안했습니다. 사용자는 자신이 원하는 언어로 플랫폼을 사용할 수 있었고, 위치 기반 인증을 통해 볼링 그린 시민임을 확인받았습니다. 구글 지그소(Google Jigsaw)의 AI 분석 도구도 투입돼, 의견들의 상호 관계성 및 지역적 주요 이슈를 빅데이터 기반으로 분류했습니다.

시민들이 선택한 ‘실질적인 요구들’

제안된 3,940개의 아이디어 중 약 60%에 해당하는 2,370개는 80% 이상의 시민 동의를 얻었습니다. 이 중 시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은 아이디어는 매우 ‘지역밀착형’이었습니다. 대표적으로,

  • 전문 의료인 확충을 통해 현재 나시빌까지 가야 하는 불편 해결
  • 도시 북쪽의 식료품점과 식당 유치
  • 역사적 건물 보존 및 도시 정체성 강화
갈등을 유발한 주제들과 AI의 한계

물론, 모든 아이디어가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낸 것은 아닙니다. 여전히 논쟁적이거나 의견이 극명히 갈리는 주제도 존재했습니다. 대표적으로,

  • 기호용 마리화나 합법화
  • LGBTQ+ 차별금지 조항의 확대 포함 여부
  • 사립 교육 기회의 확대 등

이러한 주제들은 공공정책으로 옮겨지기까지 더 깊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또한, Pol.is 플랫폼 운영팀은 제안 내용을 전면 노출하기 전, 모욕적이거나 반복되는 주장, 관련 없는 주제를 포함한 의견을 필터링했습니다. 최종적으로 51%의 제안이 웹사이트에 게재되었으며, 31%는 중복, 6%는 부적절 내용으로 걸러졌습니다.

전문가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하버드 케네디스쿨 아크온 펑(Archon Fung) 교수는 “지역 선거의 투표율이 보통 25%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AI 방식 시민참여는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며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AI도 결국 인간의 편향을 반영할 수 있으므로, 자체로 민주주의의 해답은 아니다”라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스탠퍼드대학교의 정치학자 제임스 피쉬킨(James Fishkin)은 "자발적 참여는 결국 비대표성을 유발할 수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는 '심층 여론조사(deliberative polling)'를 제안하는데, 이는 대표성 있는 시민들을 소집해 숙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이미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등 유럽 여러국가에서 기후 정책, 낙태 합법화 등 주요 쟁점에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실험은 끝났지만, 진짜 시험은 지금부터

AI 기반 의견 수렴이 아무리 혁신적이라고 해도, 이는 정책 수립의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현재 볼링 그린 시에서는 설문 결과를 공향사이트에서 공개하였고, 향후 시의회 및 카운티 리더십에게 권고안을 제출할 예정입니다.

Northeastern University의 민주주의 기술 연구소 소장인 베스 시몬 노벡(Beth Simone Noveck)은 “시민들이 ’140자 안의 트윗 같은’ 제안에 투표했을 뿐이지만, 실제 정책은 수개월 간의 협상, 예산 조정, 법적 검토가 필요한 긴 여정”이라고 지적했습니다.

AI 기술이 공공 참여를 이끄는 시대,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까?

볼링 그린의 실험은 기술이 민주주의를 진화시키는 가능성을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우리가 아직 이 실험을 완전히 신뢰해도 되는지는 신중히 지켜보아야 함을 상기시킵니다. 신뢰할 수 있는 민주주의는 단순히 의견을 묻는 것만이 아니라, 그 의견이 실제로 어떻게 처리되고 정책에 반영되는지를 시민에게 투명하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완성됩니다.

미래에는 AI가 시민 교육, 정보 제공, 의견 조율, 정책 분석까지 포함하는 ‘전자민주주의 전반의 인프라’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전제는 ‘기술 신뢰’ 이전에 ‘민주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한 참여 설계에 있다는 점, 그 균형을 우리는 계속 고민해야 합니다.